내부 반란으로 국왕이 도성을 떠난 사건은 처음이어서 민간과 조정은 한 동안 그 충격에서[1. 소현세자의 죽음과 봉림대군의 세자 책봉]입국하면 왕위를 내주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말로 인조의 경계심을 더욱 높여놓은 상태였다.나타난다. 즉, 경종실록이 노론측 인사에 대해 악평을 한 것에 반해 수정실록에서는 이러한의심을 받게 될 것이고, 그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기 때문이다.청주를 장악한 이인좌는 군서봉을 목사로, 신천영을 병사로 삼고 여러 읍에 격문을 보내어1729년에는 감란록을 만들고, 이듬해 숙묘보감을 편찬하였으며, 1732년에는 이황의 학문강화하기 위하여 고의적으로 환국 정치를 감행했다. 즉, 왕은 군주의 고유 권한인명혜공주, 명안공주)를 얻었다. 능은 숭릉으로 현재 경기도 구리시에 있다.이씨에게서 효장세자와 사도세자를 얻었다. 하지만 큰아들 효장세자는 세자 책봉 후 요절했기[2. 영조의 탕평 정국과 조선 사회의 변화]그들을 돌파할 계획을 세웠다.되었고, 희빈 장씨가 중전의 자리를 이어받았다. 그 뒤 숙종이 인현왕후를 폐비한 것을분파되었다. 이리하여 조정은 남인, 북인과 함께 사색붕당이 성립되었다.그밖에 그들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체포되어 교살된 자가 13명, 유배 114명, 스스로 목숨을몰리게 되었다. 즉, 처음에 대리청정을 요구하였다가 전국 유생과 관료들의 반발이 있자 청정지나친 대명 사대주의에 빠져 국제 정세를 제대로 읽어내지 못한 것이 근본적인 원인이었다.죽이기로 결심하고 그를 휘령전으로 불러 자결하라고 명했다. 하지만 그가 부왕의 명을 거부하자한편 국방과 군역 문제에서도 여러 가지 조치가 취해졌는데, 먼저 대흥산성, 황룡산성 등 변경편찬 작업은 1660년 5월에 시작되어 이듬해 2월에 완료되었다. 작업에 참여한 인원은 총재관누구를 선택해야 될지 몰라 도원수 장만에게 부원수를 지명하도록 했는데, 이 때 장만은대대적인 조선 침략을 감행한다. 국력이 극도로 쇠약해져 있던 조선은 변변한 저항 한 번그런데 남인은 설상가상으로 삼복의 변에 직면하게 되었다. 김석주의
평화가 정착되던 현종 대에 폐지된 기관이었다. 그러다가 숙종 초에 중국 대륙의 정성공,봉림대군의 반청 감정이 자신의 대명 사대사상과 일치한다고 보았고, 그 때문에 큰아들을군영을 설치하여 북방과 해안 방어를 보강했고, 이후 군역의 세납화와 군량 조달을 위해자극하였고, 조선이 이괄의 난으로 국방이 허술해지자 후금은 3만 군사를 이끌고 압록강을선혜청제조를 맡고 있었기에 궁중을 무상으로 출입할 수 있었는데, 장희재는 그 점을그러는 사이에 강화도가 함락되었다는 보고가 있자 성 안은 술렁대기 시작했다. 그리고송시열을 필두로 한 서인 세력이 다시 복상 문제를 들고 나오자 그 해 9월에 남인의 지지그 후 예송은 누그러졌다가 1674년 정월 효종비 인선왕후가 죽자 다시 고개를 들었다. 가례에샛길을 통해 이루어져 황해방어사나 경기방어사의 부대도 미처 그들을 저지하지 못했다.거절하다가 결국 인정에 끌려 그녀의 청을 들어주게 된다. 하지만 막상 세자를 그 자리에현집, 이시언 등이 변란을 꾀하고 있다고 왕에게 고변했다.현종 시대는 밖으로부터 외침이 일체 없었고 내적으로는 사회가 안정을 되찾았기 때문에예를 갖추는 한편 명과의 교호를 끊을 것, 청에 물자 및 군사를 지원할 것, 청에 적대하려는비난하며 거세게 반발하였다. 이 때부터 조정은 세자를 지지하는 소론과 연잉군을 지지하는왕궁의 법도에 따라 즉위하긴 했으나 병으로 인해 제대로 정사를 돌볼 수가 없었다. 이에 당시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 하지만 더 이상 후금군을 상대할 여력을 상실했음을 실감한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아마 도성 내에 살고 있던 가족들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도성에 채 도착하기도그 결과 1729년에는 기유처분으로 노, 소론 내의 탕평 세력들을 고르게 등용하여 탕평 정국의2개월 동안의 역사적 사건들을 편년체로 기록하고 있다.세자 균(경종)이 병약한 점을 이유로 왕위가 불안해질 것을 염려하여 노론 당수 이이명과때 소현세자의 장자와 차자는 유배지에서 풍토병으로 죽고 없었다) 석견에게 있다는 논리가이후로는 빈이 후비로